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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역사 이야기

by 볼테르7 2025.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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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엠블럼 사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Borussia Verein für Leibesübungen 1900 Mönchengladbach e.V.)는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 연고지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묀헨글라트바흐, 홈구장은 보루시아 파르트(Borussia Park)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24-25 시즌 현재 분데스리가 8위, UEFA 랭킹 88위입니다. 1970년대 독일을 넘어 유럽까지 제패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역사에 대해서 창단 배경과 성공 비결, 그리고 논란을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창단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이하 묀헨글라트바흐)는 1900년 8월 1일,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창단되었습니다. 클럽 이름에서 '보루시아(Borussia)'는 당시 프로이센 왕국(Prussia)의 라틴어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독일 내 여러 축구 클럽들이 사용했던 명칭이기도 합니다.

창단 초기의 묀헨글라트바흐는 지역 리그에서 점차 경쟁력을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19년, 클럽이 공식적으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라는 이름을 채택하며 본격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축구계에는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많은 클럽들이 전쟁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었는데, 묀헨글라트바흐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클럽은 1950년대에 들어서야 재정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952년, DFB-포칼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1963년, 독일 축구는 기존 지역 리그 체제를 개편하고 새로운 프로 리그인 ‘분데스리가’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러나 묀헨글라트바흐는 초대 분데스리가 참가 팀으로 선정되지 못했고, 2부 리그 격인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에서 경쟁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1965년, 헤네스 바이스바일러(Hennes Weisweiler) 감독의 지도 아래 마침내 분데스리가 승격을 이루었고, 이때부터 클럽은 독일 축구의 강팀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묀헨글라트바흐는 젊고 역동적인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며 강력한 공격 축구를 선보였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클럽이 ‘포일렌 엘프(Fohlenelf, 망아지 군단)’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70년대 황금기를 맞이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는 분데스리가가 세계 최고 리그로 인정받던 197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강팀으로 자리 잡았으며, FC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독일 축구계를 양분했습니다. 묀헨글라트바흐 특유의 빠른 공격 축구는 축구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969-70 시즌, 묀헨글라트바흐는 클럽 역사상 첫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강팀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분데스리가 최초로 2연패를 달성한 팀이 되었습니다. 당시 팀을 이끌던 선수들은 지금까지도 독일 축구계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묀헨글라트바흐는 1974-75 시즌부터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3연패(1974-75, 1975-76, 1976-77)를 기록했습니다. 이와 함께 유럽 대항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74-75 시즌에는 UEFA컵(현재의 유로파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유럽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했습니다. 1976-77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당시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리버풀 FC를 상대로 1-3으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의 묀헨글라트바흐는 단순히 강팀이 아니라, 공격적인 전술과 빠른 템포로 축구의 흐름을 바꾼 팀이었습니다. 헬무트 베이스바일러(Helmut Weisweiler) 감독과 이후의 우도 라텍(Udo Lattek) 감독은 창의적인 전술로 팀을 완성시켰고, 이로 인해 묀헨글라트바흐는 유럽 최고의 클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설적인 선수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설적인 선수들로는 클럽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1970년의 주축들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미드필더 부문에는 ‘귄터 네처(Günter Netzer)’ 선수가 있습니다. 네처는 1963년부터 1973년까지 팀에서 활약하며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정교한 패스와 경기 조율 능력으로 창조적인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습니다. 특히, 1973년 DFB-포칼 결승전에서 감독의 교체 지시를 무시하고 스스로 들어가 결승골을 넣은 일화는 독일 축구계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공격수 부문에는 유프 하인케스(Jupp Heynckes) 선수가 있습니다. 하인케스는 묀헨글라트바흐 역사상 최고의 골게터로, 분데스리가 통산 218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1974-75 시즌에는 27골을 넣어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UEFA컵에서의 우승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골 결정력은 독일은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수비수 부문에는 베르티 포크츠(Berti Vogts) 선수가 있습니다. 포크츠는 1965년부터 1979년까지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우승 5회, UEFA컵 우승 2회에 크게 기여한 철벽의 아이콘이었습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를 봉쇄하며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끈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은퇴 후에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1996년에 열린 유로에서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로도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포크츠는 묀헨글라트바흐 팬들에게 있어 클럽의 정신을 상징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맺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1970년대 분데스리가와 유럽 무대를 지배했던 유서 깊은 클럽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FC 바이에른 뮌헨이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처럼 강팀으로 평가받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독일 축구계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유럽 대회에 진출하며 부활의 신호를 보였던 묀헨글라트바흐가 다시 한번 1970년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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